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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길, 부여에서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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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 낙화암

부소산(扶蘇山)은 부여읍 쌍북리, 구아리, 구교리에 걸쳐 있는 해발 106m 고도를 가진 부여의 진산이다. 평지에 돌출하였으며, 동쪽과 북쪽은 가파르고 백마강과 맞닿았다. 부소산의 산 이름은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에 처음 선보이며, ‘부소(扶蘇)’의 뜻은 백제시대 언어로 소나무()’의 뜻이 있어, 부소산을 솔뫼라고 보는 학설이 유력하다.

부소산은 평상시에는 백제왕실에 딸린 후원 구실을 하였으며, 전쟁때에는 사비도성의 최후를 지키는 장소가 되었던 곳이다부소산 내에는 군창지, 낙화암, 백화정, 사자루, 삼충사, 서복사지, 영일루, 고란사 등 여러 유적과 유물들이 산재해 있으며, 역사성과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산이다.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져 죽은 장소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훗날 그 모습을 꽃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절벽에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낙화암(落花岩)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낙화암의 기암절벽은 백마강에서 배를 타고 돌아갈 때 더 잘 보인다.

 

정림사지 5층석탑

정림사는 백제 성왕이 538년 사비성(부여)으로 도읍을 옮길 때 건축한 백제의 대표적인 사찰로 왕궁 정남쪽에 위치하고 있다정림사지 절터 한가운데 자리한 정림사지5층석탑은 높이가 8.33미터의 결코 작지 않은 탑으로 탑신부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 민흘림기법을 적용하여 상승감을 보여주는 등 장중하면서 부드럽고 육중하면서 단아한 세련된 백제의 멋을 느낄 수 있는 백제계 석탑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준다.

1층 몸돌에는 신라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하고 세운 기념탑이란 글씨를 새겨놓아 한동안 소정방이 세운 평제탑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는 정림사가 사비 백제의 중심이자 상징이었음을 반증하는 상처이다.

석탑이 위치한 곳에 정림사지 박물관이 20216월 리모델링 후 재개관하였다. 백제불교의 정수인 정림사지에 최첨단 기술을 접목하여 정림사지 축조와 발굴까지의 과정을 새롭게 체험할 수 있다. 정림사지 인피니티룸, 스피어영상관, 미디어아트. 무안경 VR 체험 등이 있다.

 

궁남지

궁남지는 신라 선화공주와 결혼한 무왕의 서동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삼국사기백제 무왕 35(634) 궁의 남쪽에 못을 파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채우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상징한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이 연못은 백제 무왕 때 만든 궁의 정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못의 동쪽 언덕에서 백제 때의 기단석과 초석, 기와조각, 그릇조각 등이 출토되어 근처에 이궁(離宮)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못 가운데 섬을 만들어 신선사상을 표현한 궁남지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인공정원으로 백제의 노자공은 일본에 건너가 백제의 정원 조경기술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백제가 삼국 중에서도 정원을 꾸미는 기술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사계절이 아름다운 관광지이다. 7월에는 천만송이 연꽃들의 아름다운 향연인 서동연꽃축제가 열리고, 10~11월에는 다양한 작품으로 꾸며진 굿뜨래 국화전시회가 열려 궁남지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부여 왕능원

사비시대(538~660)의 백제왕릉묘역이다.

동쪽 나성(羅城)의 바로 바깥에 위치하고 있다. 7()의 고분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도 각기 고분이 분포하고 있어 크게 3개의 무덤군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가운데 중앙구역에 위치한 무덤들이 그 크기나 위치로 보아 사비시대 역대 왕들의 왕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 고분군의 입지는 전통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지세(地勢)와 잘 일치되고 있어 백제 당시에 이미 풍수지리사상이 있었을 가능성을 엿보이고 있다.

7기 고분중 동하총(東下塚)1호분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고구려와 백제의 교류를 증명해 주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이래 여러 차례 조사되었으나 부장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옻칠과 금박(金箔)으로 장식된 관()의 파편만 남아있었다.

최근 나성과 능산리 왕릉묘역 사이의 계곡에서 이곳에 안장된 역대 왕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절터가 조사되었는데, 그곳에서 백제 금속공예의 진수(眞髓)를 말해주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제287)와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제288)이 출토되어 백제문화의 우수성을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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